top of page
로고.png
레이어 1.png

​호접란

​당신을 사랑합니다

​글 세르 @serphy_endw

최근 창조물관리국장은 재미있는 짓을 하나 벌인 바 있었다.
"재미있는 짓이 아니라 무익한 짓 아니냐."
아쉽게도,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무언가는 아니고. 그저 식물 이데아 신청서에 필수 기입
항목을 하나 더 추가한 정도지만. 창조마법을 유용할 때 실용성만 고려해서는 아무래도
감수성이 메마르기 쉬우므로. 해서 이는 휘틀로다이우스 나름의, 대중의 감수성 향상을
위한 방침이었다. 물론 이걸 인류 최초로 고민하게 된 친우의 의견까진 묻지 않았다.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말야.
"음? 로망이 있잖아."
내 권한으로 칠 수 있는 장난은 이 정도 뿐이라고. 휘틀로다이우스의 손가락 사이로
펜이 핑그르 돌았다. 무게중심을 잘못 잡았는지, 펜은 신청서 위에 곧장 떨어져 내렸다.
잉크가 묻은 펜촉 끝이 단어 하나를 가리켰다.
꽃말.
"우리의 창조는 이 별을 유익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식물 하나하나에 감정적인
의미를 붙일 필요가 있나?"
"작은 예술 행위라고 생각해 줘."
길고 하얀 손가락이 '꽃말'이란 단어 바로 밑에 자리했다. 휘틀로다이우스는 그 두
글자를 강조하듯 종이 한 구석을 꾹 눌렀다. 친우의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에메트셀크는
한숨으로 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저 쓰잘데기 없는 항목을 없앨 생각은 안
하시는 듯하다. 그래, 국장님이 적으시라면 적어야지. 그런데…
"갑자기 꽃의 의미를 생각하라고 해도 말이다... 난 예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해. 그거 너랑 아젬이 결혼 기념일마다 서로에게 선물하는 거잖아."
사랑 관련해서 적어 보면 어때? 친구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한껏 섞였다. 자기가
고안하는 거 아니라고 말은 쉽게 한다. 이래서 창조물관리국 놈들은 답이 없어. 모
위원이 능글맞은 국장을 보며 혀를 한 번 찼다.
"미치겠군, 정말..."
에메트셀크는 예술에 관해서는 거의 문외한에 가까웠다.
접할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아모로트에 널린 게 박물관이요 전시회니까. 어릴
적부터 형이 예술 작품을 좋아해서, 하데스는 미술관이든 음악회든 매번 형을 따라갔다.
따라가기만 했다. 작품을 직접 보진 않았다. 음악은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혼이 코앞에 있는데, 다른 걸 느낄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덕분에 사랑은 가득 차올랐으나 감수성은 형편없이 메마르고 말았다. 다 자업자득이다.
꽃에 붙일 의미 하나가 떠오르지 않아 머리를 싸맬 정도니 말 다 했지.
"사랑에 관해서 써 보면 좋지 않을까? 넌 아젬을 사랑하잖아. 이건 부부 간의 선물로
천 년 넘게 쓰여 왔고."
"사랑이라..."
마디 굵은 검지가 몇 번 책상을 두드렸다. 시계 초침 소리와 책상 두드리는 소리가
박자를 이뤘다. 거친 전주는 손님 몫의 커피가 미지근하게 식을 때쯤이 되어서야 멈췄다.
펜 사각거리는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이런 걸 적어도 되는 거냐?"
휘틀로다이우스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이렇게 훌륭한 답을 적어 낼 줄 알면서
뒤로 내빼다니.
"물론이지. 이걸로 충분해."
"됐군. ...이데아는 크리스탈에 옮겨뒀으니 이 꽃은 도로 가져가겠다. 오늘이 마침 결혼
기념일이라."
마디 굵은 손이 작은 화분을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두 명의 결혼
기념일이었던가.
아젬에게 들은 바 있었다. 결혼 기념일엔 저녁 식사를 하기 전 늘 꽃 교환식부터 한다고.
색만 다른, 같은 꽃을 주고받고, 서로가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고, 언덕 위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고... 서로를 끌어안고, 같은 침대에서 잠에 들고. 그렇게
최고로 행복한 한때를 보낼 거라고. 눈을 빛내며 계획을 말하는 아젬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망울이 환희에 젖었지. 그 모습이 실로
아름다웠다.
"응, 축하해. 좋은 하루 보내길 바래."
부디 너희 두 명의 사랑이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그리하여 행복에 가득찬 나날을
보내기를.
그것이 곧 나의 기쁨이기도 하니까.
다음 사람 들어오세요. 휘틀로다이우스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는구나."
오랜만에, 혹은 새로 만난 그리운 친구는, 색다른 형태로 태어나서도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혼은 옅어지고, 빛에 파묻혀 심히 흐트러졌으나 본질은 여전히 그 시절과
다를 바 없었다. 영혼의 색뿐만 아니라, 그 마음까지도. 에테르를 보는 눈은 상대의
대략적인 감정까지도 어렴풋이 읽어낸다. 작은 벗이 과거의 정인을 지금 어찌
생각하는지 정도는 순식간에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이다.
"...죽어도 변하지 않는 것도 있네. 줘도 되겠다."
"뭔 소리야?"
"있어, 그런 게."
거대한 손이 입 근처를 가리며 소리를 냈다. 빛의 전사는, 어쩐지 저 이가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얼굴이 로브에 가려 거의 안 보이긴 하지만. 음성이 아니라
텔레파시 형태의 의사소통이라 눈으로 구별이 가질 않지만. 한 마디로 판단의 근거가
전혀 없지만. 어쩐지, 오래 전에 그런 광경을 본 것 같아서.
"이곳의 날짜를 기준으로 하면 내일이 기념일이니..."
화는 내도 싫어하진 않을 녀석이거든. 거품이 빛의 전사를 향해 제 손을 펴 보였다.
초록빛 맑은 눈이 그 손에 시선을 두었다.
커다란 손바닥에서 따뜻한 빛이 떠오르더니, 서서히 그 형태가 바뀌기 시작했다. 따뜻한
빛이 조금씩 형상을 갖추는 모습은 어딘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감탄은 필연이었다.
조금 폼을 잡으며 만들어 볼까 싶어. 잘난 체 하는 것은 바람직한 행위가 아니지만,
간만에 너에게 선물을 줄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정도는 봐 줘. 마침 바깥도 지금
저녁이네. 완벽해. 모름지기 저녁이란 하루를 특별하게 마무리하기 좋은 시간이지. 단
하나의, 이 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혼을 위한 꽃을 창조하기에 완벽한 순간이야.
"나는 그의 무의식이 멋대로 만들어낸 존재라서 말이야, 이렇게 종종 사고를 치곤 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거품은 친구의 손에 꽃을 쥐어주고서 우쭐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 모습이 아주
위풍당당했다. 왜 꽃을 만들어 선물하는 게 사고인지는 차치하고, 일단 전혀 미안해
보이지 않았다. 빛의 전사는 모 아씨엔이 미간을 구기는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
누구의 한숨소리마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 방금 그건 물론 환청이겠지. 이 큰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신 말고는 없으니까.
"근데 왜 나에게 이걸 주는 거야?"
"음... 꽃말을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에메트셀크가 직접, 만 이천 년 동안 그 시절의
꽃말을 온 세상에 알리고 다녔으니까. 그 의미만큼은 지금도 그대로일걸. 아무튼, 너
외의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꽃이라서."
작은 친구는, 당연하게도, 이게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뭐,
찾아보면 금방 깨닫겠지. 호기심이 생기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은 지금도 그대로니까.
누가 그 영혼 아니랄까봐 통 고쳐지질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고마워. 나중에 일이 잘 풀리면 알아볼게. 잘, 풀려야겠지만."
"원하는 대로 될 거야. 너는 늘 길을 개척하곤 했으니까. 이번에도 너를 믿고 나아가.
그거면 돼."
그러면 안녕, 그립고도 새로운 친구. 휘틀로다이우스는 가볍게 손을 흔들고는, 다시 몸을
돌려 작은 친구를 등졌다. 이 앞은 두 명의 시간이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재미있다고 더 간섭했다간 방해꾼이 되고 말아.
제 3자가 할 수 있는 건 기도 정도 뿐이지. 거품은 텅 빈 허공을 올려다보며 짧게
소원을 빌었다.
부디 너희 두 명이 좋은 결말을 맞이하기를. 그것이 곧 나의 - 

레이어 2.png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