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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pin

탐욕, 삶의 욕구

​글 그랑프레스토 @Granpresto

“아, 여기 있었구나. 하데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것과 죽음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어느 쪽이 나은 것 같아?”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입이 막히기 마련이다. 물론 지금 에메트셀크가 하고 싶은 말은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의문과 불평이다. 얼마 만에 아모로트로 돌아온 것인지, 인사 한 마디 없이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난해한 주제로 대화를 걸어오는 건 뭐하는 짓인지. 사적인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니 제대로 에메트셀크라고 부르라는 지적과 당장 하고 있는 일을 방해받는 내 입장도 조금쯤은 궁금하게 여겨 보는 게 어떠냐는 진심 어린 부탁. 그 모든 말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꿀꺽 삼키면서 에메트셀크는 읽고 있던 책에 서표를 끼워 덮었다.
“일단 좀 앉지 그래.”
집무용 책상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는 소파를 가리켜 놓고 일거리로 어질러진 책상 위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 회의의 안건으로 내놓을 것, 그리고 반출해 온 곳으로 돌려보낼 자료들을 분류해 놓는 내내 시야 한 편에서 아젬의 발끝이 로브 자락 밑에서 수차례 까딱거렸다. 평소의 습관과 옷자락의 흔들림으로 쉽게 짐작이 갔다.
다른 사람의 견해를 얻고 싶다면 민중 토론관에 가서 적당한 대화 상대를 찾아보라는 권유나 과거에 비슷한 토론이 있었는지 기록을 확인해 보라는 등의 합리적이고 평범한 대답으로는 저 녀석이 절대 만족하지 않을 테지. ……사용한 표현까지 함께 짚어 생각해 보자면, 가지고 있는 지위와 명성에 비해 자유분방하기 짝이 없는 저 입에서 나올 말이 불러올 파장 역시도 에메트셀크 본인에게는 골치 아픈 일이 될 게 분명하다. 가뜩이나 14인 위원회의 사람이 공개적인 토론에 나서면 필요 이상으로 시선을 끌게 된다. 대화 내용이 알려진다고 나쁠 것도 없지만, 딱히 좋을 것도 없다. 그렇잖아도 아젬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대단하고 의지가 되지만 조금 별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돌고 있는 만큼, 주의하는 편이 좋겠지. ……배려가 무색하게도 매순간 착실히 그 쪽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래서? 이번엔 밖에서 뭘 보고 와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건데?”
“우선 네 대답부터 먼저 들려줬으면 좋겠어.”
에메트셀크는 아젬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겨 앉으면서 이미 반쯤은 버릇이 된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부탁을 받으면 도움을 주는 역할은 내가 아니라 네 일이 아니냐는 지적은 이제 꺼낼 기운도 없다. 내키면 일단 저지르고 보는 녀석. 거기에다 만만찮은 고집. 이번에도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전엔 순순히 돌아가려 하지 않겠지. 그렇다면 차라리 빨리 응대해 주고, 저 끝 간 데 없이 왕성한 호기심을 채워주는 편이 나았다.
“우선은 죽음이라는 표현부터가 우리들에게는 그다지 알맞지 않다는 점부터 지적하고 싶은 참이다만.”
너도 알다시피 우리들은 거의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살아. 별을 좋게 만든다는 책무를 충분히 다할 수 있도록 말이지. ……죽는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제 의지와 무관한 끝, 이를테면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경우에나 적합하지 않겠어? 제 역할을 다한 생명이 명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지만 여기서부터 짚고 들어가면 네가 원하는 답을 듣는 데 몇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르니 이쯤 해두지.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게 죽음…… 보다는 낫다고 여겨.”
“어째서야?”
숙고 없이 곧바로 짧은 반문이 돌아왔다. 거기서부터 에메트셀크는 아젬이 준비한 답이 자신의 것과는 다를 거라는 결론을 이르게 얻어낸다. 어떤 이유로 결론을 내리고서 대화를 청했는지는 몰라도 간단히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오래 마주하고 긴 시간을 함께한 상대이기 때문에야말로 추측은 근거 없이도 빠르게 확신으로 변했다.
“만나서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각자의 시간이 멈추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야. 어디에 있든 상대의 삶이 이어지고, 선택과 행동의 결과로 행복과 기쁨을 얻으며 해야 할 역할을 다하고 있다면 그 편이 낫잖아. ……그럴 기회조차 단절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지만, 영원히 만나지 못한다는 거라고? 결국 잘 지내고 있는지 알 수 없고 이쪽의 상태도 전할 수 없는 거잖아. 죽음이 가져오는 끝과 결과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우리들은 누구나 생각을 구현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언젠가는 바라는 대로의 결과에 다다를 수 있어. 혹시 네가 상정하고 있는 상대방이 아직 어리다거나,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자신의 선택을 후회할 만한 인물이기라도 한 거냐?”
“그렇지 않아. 오히려……, 전혀 그렇지 않아서 마음에 걸려.”
주저 없이 대답이 돌아온다. 확실히 그저 에메트셀크의 견해를 묻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 아젬이 아는 어떤 누군가를 확실히 염두에 두고 말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순간적으로 괴로움을 참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 것만 봐도 적잖게 소중히 여기는 사람인 거겠지. 아니면 밖에서 보고 온 것,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는 고민이라면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굳이 묻거나 심중을 파헤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상대를 존중하는 방식이다. 에메트셀크는 고민의 원인이나 미지의 상대방에게 호기심을 갖는 대신, 냉정한 토론의 상대가 아닌 친구로서 대화를 이어가기로 마음먹는다. 잠깐 내비친 불안정한 모습 때문일까. 목소리도 조금은 위로를 건네듯 부드러워졌다. 
“우리들에게도 끝, 그러니까 네가 말한 의미에서의 죽음은 존재해. 대개 그건 자신의 삶에 대한 충분한 만족감을 동반한 이후의 선택이지. 그건 존중받아야 할 선택이고, 자랑스러운 마무리잖아.”
“그렇지만 하데스, 본인은 충분히 만족하고 끝을 받아들이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슬퍼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을 거야.”
“그런 경우가…… 뭐, 없진 않군. 본인의 선택을 존중해야 마땅하다는 걸 알더라도 아쉬움을 느끼는 경우는 있으니까.” 
“굉장히 외롭겠지. 물론 계속 살아있다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 새로 생겨난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때로 웃을 수 있는 날도 오겠지. 그래도, 한 번 생겨나버린 고독은 없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어…….”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감정이 덮어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발언이었다. 튼튼하고 끈질긴데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 대담함 같은 것이 장점으로 꼽히는 아젬치고는 상당히 감상적인 대답이기도 하다.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차라리 종종 그랬던 것처럼 도움을 요청하면 될 것을. 에메트셀크는 지나치게 무거워지려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일부러 과장스럽게 농담을 던졌다.
“무슨 일이야, ‘경애하는’ 아젬 님. 누군가에게 그, ……죽음에 대한 고민 상담이라도 받은 거냐.”
“아니야. 내 개인적인 의문이었어.”
고개를 내저으며 가볍게 한숨을 내쉰 아젬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 건너편으로 넘어와 에메트셀크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어렸을 때 자주 그랬던 것처럼, 혹은 곤란한 것을 부탁하려고 할 때 내보이는 어리광 비슷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으레 그랬던 것처럼 치대며 끌어안는 대신 가볍게 체중을 실어 어깨를 기대고 손을 더듬어 잡는 수준에서 접촉이 멈추었다. 때로 떨어지라고 밀어내고 싶을 만큼 후텁지근하게 굴던 녀석 치고는 꽤나 담백하지 않은가 싶을 정도다.
“무슨 일로 고민하고 있는지는 말해주지 않을 생각이야?”
“……응, 이제 괜찮아. 그냥 잠깐,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거구나 싶었던 것뿐이니까.”
“그건 또 어째서지? 하려고 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적어도 자신은 그렇다고 주장하듯 단호하게 되받아친 것은 순간적인 고집 때문이었다. 그야, 혼자라면 외롭기도 하고 힘들기도 할 것이다. 에메트셀크 역시 누군가와 함께하는 일상의 소중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독 정도는 스스로 견뎌내야 할 때가 있지 않은가. 실제로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의 곁에 영원히 머무르며 행동을 함께하기는 지극히 어렵다. 사이가 좋기로 유명한 미트론과 알로그리프만 봐도 말이지. 그렇게 제 태도를 합리화해 보아도, 무언가를 숨기듯이 중요한 요점은 말하지 않고 테두리만을 빙빙 돌고 있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는 사실을 그 자신은 알았다. 내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지도, 그렇다고 주절주절 이유를 설명할 수도 없어서 미간을 찡그린 채 심기가 불편해져 있는 에메트셀크의 복잡한 속내를 알겠다는 등 아젬은 표정을 풀며 빙긋 웃었다.
“그럼 이번에도 우리의 견해는 합의에 다다르지 못했지만, 여전히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는 점을 기뻐하도록 하자.”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금방 표정을 바꾼 것도 모자라서 이번에는 갑자기 무거운 화제를 가져온 사람답지 않게 쾌활하게 굴기 시작한다. 우울감에 빠지거나 괴로움을 견디거나, 별로 믿기지는 않지만 고독을 느끼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제대로 마무리되지도 않은 대화로부터 아젬이 무엇을 느끼고 어떤 결론을 얻었는지는 쉽사리 짐작가지 않게 됐다. 이것도 저것도 마음에 차지 않는 일들뿐이군. 에메트셀크는 칫, 짧게 혀를 차면서 잡혀 있던 손을 슬그머니 빼냈다.
“새삼스럽게 기쁠 것도 없어. 너와 토론을 하면 한 번도 명확하게 결론이 난 적이 없잖아.”
“응? 나는 그래서 좋아하는데, 하데스 너와 이야기하는 거.”
“……에메트셀크라고 해.”
저절로 낯이 간지러워질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는 아젬은 평소 기억하는 것과 다름없이 가볍고 부드럽고, 적당히 유쾌한 모습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정말로 그저 궁금했던 것뿐이었을까. 마음 한 편에는 여전히 의혹이 남아 있었음에도 에메트셀크는 제 친구가 말하려 하지 않는 부분을 굳이 따져 묻지 않았다. 도움이 필요하거나 부탁할 것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며 부를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화가 끝났으면 그만 돌아가라고 축객령을 내리거나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서지 못한 것은, 여전히 아젬이 한 팔을 끌어당겨 안듯이 몸을 꼭 붙이고 있어서였다. 그 녀석이 답지 않게 외로움이나 고독 같은 말을 꺼내서가 아니라.







과거의 기억, 그 중에서도 당장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대화를 떠올려버린 것은 주변이 죽음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에서도 한 남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숱하게 널린 것들 사이에서도 제대로 인지할 수 있는 것은 눈앞의 하나 정도가 고작이다.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연이어 들리는 폭음이 메아리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고막에 일시적인 손상이라도 생겼는지 귀가 온통 먹먹했다.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시야도 상당히 가려졌지만, 그 점에는 오히려 고마움 비슷한 것을 느낄 지경이었다. 타는 냄새, 피비린내, 서서히 잦아드는 신음과 비명. 시각 밖의 것을 볼 수 있는 눈의 힘을 쓸 마음조차 들지 않는 처참한 광경을 피할 수 있으므로.
퇴각 중이던 적의 반격에 휘말렸다. 승기를 잡고 밀어붙이던 도중 희생을 각오한 마법병 두엇을 저지하지 못한 탓이었다. 후방에서 전술 지시를 하고 있던 솔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폭발 자체는 멎어 있었지만 이미 수습할 길은 없었다. 위생병을 투입할 필요도 없을 만큼 생존자가 적었으므로, 전장의 한가운데에서 이 주변만이 기묘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거기, ……누구 있어?”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부상자는 희미한 인기척을 알아차리고 절박하게 제 말을 들어줄 누군가를 찾아 목소리를 짜낸다. 기록에는 전사, 실질적인 이유는 아마도 화상과 출혈로 인한 쇼크사. 사후의 처리는 서류상의 계급 변동과 유가족에게 지급할 약간의 위로금으로만 끝나버릴 죽음의 순간을 바라보며, 젊은 지휘관은 대답 대신 생각을 이어간다. 이 죽음은 그 본인의 부족함 같은 이유가 아니다. 폭발로 달궈진 기체와 찌그러진 장치에 두 다리가 끼어버려서야, 백날 훈련을 해도 살아남을 도리가 없다. 연료 탱크에서 새어나온 청린수와 병사가 흘린 피는 기묘하게 섞이지 않으면서도 똑같이 동토를 적시고 있었다. 각성과 혼절을 반복하며 천천히 죽어가던 남자는 성한 손으로 제 품을 천천히 뒤져냈다.
“누구라도, 거기 있다면…… 이걸, 가족에게, 부탁…….”
힘겹게 꺼내든 것은 식별표와 표면이 반들반들하게 닳은 가죽 수첩이었다. 수첩의 낱장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게 뭔지 굳이 펼쳐 확인하지 않아도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흔히 그렇듯 편지 뭉치와 서투르게 그려져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초상화 같은 것들이겠지.
“……그래, 전해주지.”
그 한 마디 이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엄습한 죽음에 시각마저 어두워진 듯한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통이 묻어나는 호흡 끝에도 파들거리는 입술이 느린 호선을 그렸다. 그 입술로부터는 더듬더듬, 길 잃은 말이 흘러나왔다. 짧은 감사의 인사, 운이 나빴다는 한탄,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적을 향한 원색적인 욕설, 남겨질 제 피붙이들에 대한 염려들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가 멈추었다. 그나마도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고 몸이 차갑게 식어가며 죽음의 감각이 가까워질 때쯤에는 말이 아닌 절규에 가까워져간다. 죽고 싶지 않다. 살고 싶어. 돌아가게 해 줘, 가족이 보고 싶어. 여기서 이렇게 혼자서 끝나고 싶지 않다는 절규는 곧 가쁜 숨에 묻히면서 끊겼다. 이미 한참 전부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눈이 똑바로 감기지도 못한 채 움직임을 멈춘다. 말없이 그 광경을 끝까지 지켜본 솔 갈부스는, 쓸쓸하게 죽어가는 자에게 찰나의 다정한 위로를 건네거나 삶이 더 이어지도록 도와줄 수도 있었을 아씨엔은 생각한다. 너희가 말하는 살고 싶다는 소망은 오만이고 욕심일 뿐이라고.
세상이 갈라지고, 누구도 평등하고 온전한 삶을 가지지 못하게 된 지금 탐욕은 인류의 원동력이나 다름없다. 더 가지고 싶다, 더 나아지고 싶다, 보다 많은 것을 누리고 싶다. 알고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다. 그런 욕망 위에서는 항상 손쉽게 불화와 반목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냈다. 시료 위에 시약을 떨어뜨리듯 몇 번을 반복하여 시험하고 판정해 왔던가. 그 결과가 만족스러웠던 적이 있기는 했나.
나는 한 번도 네가, 너였던 것들이, 우리들로부터 비롯된 것들이 기회를 잃고 불변과 완전성을 잃고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 제멋대로의 삶에 기쁨과 만족이 존재한다고 믿을 수가 없단 말이다. ……이런 세상에 발을 디디고 있으면 그럼에도 어디선가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어. 깨지고 흩어진 파편 각각이 새로운 삶을 얻고 더 많은 가능성을 품더라도 결국 그건, 그런 건 아무것에도 쓸모없는 미약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너를 잃었지만 너의 여정과 선택은 살아남았다. 우리들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을 때 네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이제는 짐작할 수조차 없다. 셋밖에 남지 않은 원형으로서, 아름답고 온전했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더라도, 가야 할 곳으로 향하더라도 두 번 다시 우리는 만날 수가 없다.
그러니 어쩌면 그 때 나누었던 대화의 결론은―…






솔 조스 갈부스는 설핏 기울어지려는 목에 힘을 주었다. 머리 위에 올린 투구와 같은 형태의 높은 관이 새삼스럽게 무겁게 느껴진다. 길러 내린 머리카락은 거추장스럽고 머리와 어깨와 등을 짓누르는 무게 때문에 고개를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이런 것을 쓰고 있으면 내리깐 시선만을 움직여 발아래의 것들을 볼 수밖에 없게 된다. 그 몸짓이 낮은 곳에서 조아리고 있을 때 얼마나 오만하게 보이는지를 알면서도 말이지.
아무래도 선잠이 들었다 깬 모양이다. 깜빡이며 움직인 눈꺼풀 안쪽이 모래를 부어 넣은 듯 깔끄러웠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오는 것들이 불쾌할 정도로 흐릿한 건 잠 탓이 아니었고 그 사실이 에메트셀크를 서글프게 했다.
……하려고 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아주 작게, 한숨에 섞여 새어나온 말은 누구를 향한 것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 누구도 그로부터 이렇다 할 진심을 얻어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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