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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풀

​약속, 행운, 평화

​글 낙원 @Solarf1are

​​하데 아젬 (논컾) + 아씨엔 에메트셀크와 빛의 전사 
이야기 속 아젬에겐 외형 및 성별에 대한 서술이 붙지 않으나 후에 등장하는 빛의 전사(여전히 외형 빛 성별은
표현되지 않으며 딱히 이름도 드러나지 않는 미코테로 표현됩니다!

어느새 길게 우거진 푸른 나뭇가지 사이로도 소리 없이 불쑥 들어선 노란 햇빛이 그 경계에 걸려있는 하얀 발끝을 은밀하게 간지럽히고 있었다. 발이 짧게 꿈틀거렸다.
그렇게 몇 분이 더 지난 후... 결국 꽤 불량스럽게 보이는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나른하게 피고 있던 긴 다리마저도 청록빛 그늘 밑으로 집어 넣은 하데스가 길게 하품을 내뱉었다.
도착하자마자 가져온 책을 펼치며 나무 그늘 밑에 자리를 잡은 하데스와는 다르게 사방을 바쁘게 돌아다니던 (하데스는 순간 아젬이 자신과 동행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홀로 아모로트로 돌아가는 건 줄 알았다) 아젬은 하데스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무렇게 주저앉은 채로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평소보다도 유달리 품이 큰 검은 로브 덕분에 (분명히 로브를 창조할 때 다른 생각을 했을 거라는 것에 하데스는 자신이 아끼는 깃털펜을 망설임 없이 걸 수 있었다) 하데스가 앉아있는 위치에서는 가끔씩 하얀 팔이 좌우로 넓게 움직이는 것 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아까보다도 더 살짝 오른쪽으로 삐뚤어진 아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깐 고민하던 하데스는 반하고도 조금 더 읽는 데에 성공한 두꺼운 책('삶과 죽음의 모호한 경계'... 야외에서 햇빛을 받으며 읽기 참 좋은 책이다)을 옆에 내려둔 채 몸을 일으켜 살짝 끈이 헤진 갈색 가죽 샌들을 터벅거리며 움직였다. 
한참 동안 바르지 않은 자세로 바닥에 아무렇게 앉아있던 탓에 오른쪽 무릎과 양쪽 어깨, 손목 등 아주 다양한 곳에서 살짝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이건 적당히 모르는 척해주도록 하자.
성의라곤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는 뭉툭하고 거대한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다채로운 빛깔을 품은 꽃과 길게 자란 풀이 동시에 항의의 뜻을 가득 품은 아우성을 크게 질렀지만, 정말 애석하게도 그 발의 주인이 다른 누구도 아닌 명계의 왕이었으므로 별 도움이 되진 못한 것 같았다. 명왕이 앞으로 성큼 나아갈 때마다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갈색 가죽 샌들로 무참히 짓눌린 녹색 풀 위에 당당히 자리 잡은 명왕이 눈을 밑으로 굴리며 한참 동안 꾹 닫고 있던 입을 움직였다.

"뭐 해?" 
"...."
“....”

자그마치 10초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하데스는 방금 전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문제라 치기엔 자신과 아젬 사이엔 목소리를 막을 만한 그 무엇도 없었으며 (굳이, 정말 굳이 끼우자면 거대한 발밑에 여전히 폭삭 짓눌려있는 풀 정도가 있겠다) 하데스는 자신의 절친한 친우가 무엇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그게 누구든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체적으로 음소거를 해버리는 아주 좋지 않은 버릇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음소거 대상에 자주 들어가 본 사람으로서 (정말 맹세코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었다) 그냥 이번에도 아젬에게 무참히 음소거를 당한 거라 판단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쯧…”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을 빠르게 종결해 낸 하데스가 짧게 혀를 찼다. 


"... 깜짝이야! 인기척 좀 내면 안돼?"

그 작은 소리에 아젬이 뒤늦게 위아래로 크게 들썩였다. 마치 바다 위로 예고없이 뛰어오른 가오리 같은 모양새였다. 목소리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혀를 차는 작은 소리엔 바로 반응한다는 점이 심히 어이가 없었으나... 날씨도 좋겠다, 검은 로브 덩어리가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움직인 게 웃기기도 했겠다, 하데스는 오랜만에 자애로운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여전히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아젬이 두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뭐 하냐고."
"아, 토끼풀 반지를 만들고 있었는데...."
"반지를?" 
"하나 줄까?" 
"나한테?"
"너한테."

대체 이런 건 또 어디서 언제 배워온 거람? 여전히 팔짱을 단단히 낀 채로 아젬과 아젬의 손가락 사이에 가볍게 들려진 토끼풀 반지를 뚱한 눈빛으로 번갈아보던 하데스가 이윽고 천천히 하얀 손을 펼친 채로 내밀었다.  
언제나와 같이 퉁명스러운 표정과 단조로운 목소리로 생긴 게 조악하다 혹평할 수도 있었으나 (수많은 사람들이 창조물 관리국에서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오게 한 일등 공신이 다름 아닌 하데스임을 한 번씩 기억해주자) 나름 내구성을 신경 쓴 건지 무려 두 개의 줄기를 엮어 반지의 마감을 해둔 거라든지, 상하좌우로 햇빛을 잔뜩 머금어 새하얗게 펼쳐진 꽃이 반지의 중앙에 오도록 공들여 배치해둔 거라든지, 한참 동안 풀 줄기를 만진 탓에 둥근 손끝이 연두색으로 옅게 물들어 있는 것 등 마음에 드는 구석이 몇 개 보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때껏 아젬이 선물이랍시고 주는 각종 잡동사니들을 (여기서 하데스는 마음속으로 아젬에게 들리지 않을 심심하고 작은 사과를 건넸다. 그런데 별로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딱히 거절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네 거야."

여전히 바닥에 쭈그려 앉은 상태로 몸만 살짝 돌리고 있던 아젬이 입꼬리를 양옆으로 죽 올린 채로 하데스의 넓은 손바닥에 비교 하자면 아주 자그마한 크기의 토끼풀 반지를 올렸다. 짧게 잘 다듬어진 손톱이 그 손바닥을 아프지 않게 두어 번 두드리고 사라졌다. 
"그런데 보통 이런 걸 만들어 줄 땐 먼저 받는 사람의 손가락 크기를 재야하는 거 아냐?" 하데스가 의문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아젬은 그 반지를 하데스에게 건네준 걸로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가 고개를 숙인 채로 풀을 고르는 것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흠.” 하데스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야말로 못들은 척을 하는 걸 보니 딱히 생각해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뒤에서 앉아있는 상태로 드문드문 바라볼 땐 도시를 나오자마자 냉큼 뒤로 넘겨둔 모자 덕분에 크게 티가 나지 않아 몰랐었지만, 옆에 선 지금에서야 아젬이 반지가 될 슬픈 운명의 토끼풀을 찾기 위해 거의 땅에 얼굴을 박기 일보 직전으로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하데스가 못 볼 걸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로 슬쩍 옆으로 물러섰다. 새롭게 짓눌리게 된 풀들이 짧게 바스락거리는 아우성을 질렀다.
신중하다면 신중하다 할 수 있을 손길로 (참고 : 하데스의 눈에는 그리 신중해 보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풀을 고르고 있는 왼손에 이미 끼워져 있는 반지와 방금 자신에게 건네준 조금 작은 반지를 보면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지금 새롭게 만들어질 반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휘틀로다이우스의 차지가 될 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흠…….” 하데스가 아까보단 길게 숨을 내쉬었다.
유일한 하나면 더 좋았을 텐데… 여전히 아젬으로부터 살짝 떨어진 상태로 받은 토끼풀 반지를 이리저리 돌려보는 도중 뭍 위로 예고도 없이 스물 올라온 생각을 하데스가 재빠르게 고개를 저어 사방으로 털어냈다.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않은 움직임에 새하얀 머리카락이 파도 거품처럼 크게 들썩였다 천천히 가라앉았다. 
내가 방금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하데스가 비어있던 손으로 제 볼을 긁적였다. 여전히 휘틀로다이우스는 자신의 훌륭한 친구였고 (가끔 좀 짜증 나긴 했지만) 아젬도 좀 짜증 나긴 했지만 (가끔 좀 훌륭했다) 두 사람은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친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데스, 이거 좀 봐!"

어느새 우스꽝스럽게 숙이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킨 아젬이 유독 하얀 꽃송이가 커다란 토끼풀을 제 앞에 내밀고 있었다. 이걸 네 반지에 썼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든지, 이쪽 말고 다른 쪽도 돌아다녀 봤어야 했다든지, 그래도 제법 마음에 들지 않냐든지, 네가 원한다면 휘틀로다이우스 몰래 반지를 바꿔주겠다든지와 같은 두서없는 말을 속사포처럼 내뱉는 아젬을 보던 하데스가 이내 짧게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어차피 네 마음대로 할 거잖아..." 





"없어졌어."
"뭐가?"

하데스의 듣기 드문 심란한 목소리에 휘틀로다이우스가 바닥에 깊게 처박고 있던 고개를 빠르게 들어 올렸다. 그 움직임에 기다란 머리카락이 마치 폭포수처럼 올라왔다 밑으로 쏟아졌다. 여전히 서류에 필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은 상태로 하데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이 주고 간 반지 말이야."
"아아, 그 토끼풀 반지를 말하는 건가? 별일이네... 네가 물건을 잃어버리는 건 드문 일이잖아. 특히 아젬이 주고 간 거라면 말이야. 당장 네 집무실만 봐도..."
"... ..."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마친 휘틀로다이우스가 과장된 눈짓으로 집무실 안을 훑었다. 하데스가 슬쩍 눈을 옆으로 굴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하데스의 집무실은 꽤 넓은 편에 속했으나 그 크기가 무색하게도 사방이 잡동사니로 가득해 넓다는 느낌을 받긴 힘들었다. 잡동사니들이 책장을 차지한 덕에 책장에 꽂혔어야 할 책들이 모퉁이마다 놓여 있어 (쌓여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모양이었고, 어떤 책 더미들은 천장에 닿기 일보 직전이었다. 도대체 책을 어떻게 빼는 걸까 궁금해질 정도였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공간보다 좁게 느껴졌다. 
휘틀로다이우스는 커다란 책장들이 굳건하게 세워져있는 하얀 벽 틈 사이사이에도 잊을 만하면 끼워져 있는 다양한 잡동사니들의 출처는 굳이 방의 주인에게 묻지 않아도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을 이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휘틀로다이우스가 하얀 가면 너머로 눈을 가볍게 반달 모양으로 접었다.
수많은 잡동사니들 속엔 누군가 당장 버리라고 한다면 그 말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물건들(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도 몇 개 있었는데, 그 중 하나 예를 들자면 하데스의 등 뒤에 세워져 있는 높은 책장 한구석에 비스듬하게 끼워져 있는 피닉스의 깃털을 들 수 있었다.
아마 완전히 식는 데까지 아주 긴 시간이 들었을 피닉스의 깃털은 얼마나 오래된 건지, 깃털의 구석구석까지 전부 다 색이 회색빛으로 바래 이제는 그 누구도 피닉스의 깃털이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해?” 한참 동안 말없이 자신의 뒤를 바라보고 있는 휘틀로다이우스에게 하데스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냥 단순히 줄여 말하자면 그 장엄하고 위대한 피닉스의 깃털보다는 그냥 길거리에 흔해 빠진 깃털처럼 보였다는 말이다. “아무 생각도 안 했어.” 휘틀로다이우스가 슬쩍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창문을 닫을 새도 없이 불려갔었거든. 아마 그 사이에 없어진 것 같아." 하데스가 여전히 미심쩍어 보이는 듯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로 말을 이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휘틀로다이우스가 가볍게 수긍했다.

그나마 다른 곳보다는 깔끔히 정돈되어 있는 (정말 그나마였다. 팔이 닿는 부분을 제외하고 책상엔 빈 찻잔으로 만들어진 탑과 각종 종이들이 마치 지도처럼 펼쳐져 있었다) 기다란 갈색 책상 옆에는 벽 한 면을 크게 차지한 창이 있었는데, 하데스는 잡동사니보다도 더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곧 반대가 될 지도?) 책들의 건강을 위해 계절과는 상관없이 자주 창문을 열고 있었으므로 쉽게 수긍이 가는 일이었다. 

"잃어버려서 아쉽겠어, 정말 귀여운 선물이었는데 말이야..."

어느새 깃털펜을 내려두고 필기를 하던 것을 멈춘 하데스가 식은 찻잔을 기울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품은 의도가 어땠든 간에 양분을 공급받던 뿌리가 무참하게 쥐어뜯긴 식물로 만들어진 거라, 차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천천히 말라가고 있던 반지를 어떻게 보관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여전히 겉으로 크게 티는 나지 않았지만 하데스는 제법 심란한 상태였는데, 애초에 창문을 닫을 새도 없이 급하게 소환을 한 것도 다름 아닌 아젬이었으므로 누굴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휘틀로다이우스가 몸을 일으켜 하데스의 앞에 놓인 책을 들어 그 사이에 꽂혀져 있던 책갈피를 자연스럽게 꺼내 책을 활짝 펼쳤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는 뜻을 상당히 많이 내포한 눈빛이 천천히 따라왔으나 오늘도 그 눈빛을 자연스럽게 무시하는 데에 성공한 휘틀로다이우스가 웃음기를 숨기지 않은 채로 중얼거렸다.


"토끼풀의 꽃말이 평화와 행운, 그리고 약속이라... 네가 이런 책도 읽는 줄은 몰랐는데."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하데스가 항변하듯 서둘러 대답했다.
"그럼 이 책에 따르자면... 우리들의 명왕께선 태양이 건네고 간 평화와 행운, 약속을 잃어버린 건가?" 휘틀로다이우스가 부러 놀란 표정을 (여전히 가면을 쓴 채였기 때문에 크게 티가 나진 않았다) 지어 보이며 말했다. 
"제발 아무렇지 않게 거슬리는 말 좀 그만할래?" 

빠르게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하데스가 휘틀로다이우스의 손에 들린 책을 냉큼 앗아갔다. 마치 정곡을 예고없이 찔린 사람처럼 보이는 날 선 반응에 소리 내 웃음을 터트린 휘틀로다이우스가 비어있던 왼손을 슬쩍 위로 들어 보였다. 
뚱한 표정으로 손을 향해 눈을 굴린 하데스가 이내 미간을 사정 없이 찌푸렸다. 들어 올려진 기다란 손에는 살짝 색이 바랬지만 여전히 무너지지 않은 토끼풀 반지가 가볍게 끼워져 있었다.

"아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하데스가 선언하듯 텅 비어있는 손을 들어 올렸다.

잠시 후, 경쾌한 핑거 스냅과 동시에 어느새 집무실 밖으로 쫓겨난 창조물 관리국장이 애달프게 닫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텅 빈 복도에 간간이 울렸으나 에메트셀크에겐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이 줄었으니 좋은 일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영웅은 순간 아니...로 시작해 오랜만에 두 발로 직접 걸어서 크리스타리움 입구로 들어오다 이름 모를 노인 (수정공이 아니다) 을 집 앞까지 배웅해 드리고 왔다 (정말 맹세코 수정공이 아니다) 로 이어져 이렇게까지 늦을 줄은 몰랐는데 미안하다로 종결되는 긴 문장을 내뱉을 뻔한 것을 간신히 눌러 삼켜냈다. 그 과정 속에서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이어서 밑으로 축 늘어져 있던 왼손을 들어 올린 두 세계의 영웅은 턱을 괸 채로 자신을 심드렁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씨엔 에메트셀크와 하나도 남김없이 텅텅 비어있는 샌드위치 바구니를 동시에 번갈아 가리켰다. 
영웅의 삿대질을 세 번이나 연속으로 받은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뭐 어쩌라고?' 의 뜻이 담긴 게 분명해 보이는 표정을 지은 채로 어깨를 가볍게 으쓱여 보였다. 

"뭐, 어쩌라고?"

아씨엔 에메트셀크의 옆에 반듯이 놓여 있는 나무 바구니 안에는 하얀 천 위에 푸른색으로 체크무늬가 새겨진 천이 포개져 있었는데, 그 천 위로 드문드문 존재하는 빵 부스러기들이 이 바구니가 원래부터 비어 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쯤 되니 영웅은 살짝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거주관을 열자마자 보이는 테이블 위에 있을 두 개의 샌드위치를 기대하며 우주의 화음 시장에 들러 오렌지 주스까지 사서 왔는데.... 

변함없이 다정한 도시의 수장은 발을 딛고 있는 세계가 달라졌음에도 변함없이 사방을 돌아다니기 바쁜 영웅이 펜던트 거주관으로 돌아올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샌드위치를 만들어주었고... 그 샌드위치는 전투 도중에도 정말 뜬금없이 생각날 만큼 (몇 번이고 침을 삼키느라 위리앙제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던 건 비밀로 하자. 위리앙제는 아직도 알게 모르게 이 일에 꽤 침통해하는 것 같았다) 훌륭한 맛을 가지고 있었다.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영웅이 말없이 테이블로 다가가 품에 소중하게 안고 있던 오렌지 주스 병을 천천히 내려놓으려는 순간 경쾌한 핑거 스냅이 영웅의 예민한 귓가를 울렸다. 이젠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영웅은 아까보다도 더 억울해진 표정으로 아씨엔 에메트셀크의 손에 들린 투명한 유리잔을 쳐다보았다. 비어있던 유리잔 속에 천천히 오렌지 주스가 채워지고 있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데? 설마 아씨엔은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잘 줄 알았어? 이거 실망인걸.... 육체를 점거한 이상 어느 정도의 기본 욕구는 채워줘야 한단 말이야. 우리들도 참 힘들지? 위로는 됐어."

아직까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결론까지 도출해 낸 아씨엔 에메트셀크를 가만히 바라보던 영웅은 언젠가 산크레드가 진지한 목소리로 낮게 읊조려주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아씨엔과는 한 마디 이상 말을 섞지 마라.' 
당시엔 산크레드가 왜 그렇게까지 말을 하는 건지 궁금할 뿐이었지만, 이제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조언엔 뭐든지 이유가 있기 마련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영웅은 과중력에 걸린 것처럼 무거운 발을 움직여 등에 지고 있던 마나트리거를 거주관의 문 옆에 우산처럼 세운 후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 짧은 사이 오렌지 주스가 담겨 있던 유리잔까지도 말끔히 비운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빨리 씻어. 도대체 어디를 다녀왔길래 그런 냄새가 나는 거야? 진창에라도 구르셨나? 흠, 초코보인지 뭔지... 그걸 탄 건가? 아마로?"

이제는 억울한 표정을 짓는 것도 포기한 영웅은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그러든 말든 몸에 달고 있던 각종 가방들을 하나씩 떼어내기 시작했다. 양쪽 팔에서 하나, 오른쪽 허벅지에서 두 개, 허리에서 여러 개 (보통 이런 것을 모험가들은 그냥 허리띠라고 부르곤 했지만 타인의 시선엔 조금 거창한 주머니 가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분산해서 들고 다닐 바엔 커다란 가방 한 개를 등에 지고 다니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이건 건드리지 마."
"흠."


영웅이 마지막으로 떼어낸 가방을 아씨엔 에메트셀크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 올려두며 경고했다. 원래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지만... 오랜만에 배도 부르겠다, 상쾌한 오렌지 주스로 입가심까지 했겠다, 지겨울 정도로 이 세계를 구하려 드는 성가신 영웅의 절망과 실망이 달콤하기도 했겠다, 마침 가방들을 두고 돌아선 영웅의 뒤로 깨끗하고 푹신하며 따뜻해 보이기까지 하는 침대가 보였으므로 아씨엔 에메트셀크는 가볍게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뭐… 그러지."

나가라는 것도 아니고, 먹은 지 오래인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다시 게워 내라는 것도 아니고, 구석구석 진흙이 묻은 지저분한 가방을 건들지 말라는 건데... 뭐 어려운 거 있나?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뒷걸음질로 방을 빠져나가는 영웅에게 에메트셀크가 손을 들어 휘저어 보였다.

“빨리 가. 냄새 난다는 말은 진짜니까.”







물을 머금어 축 처진 머리카락과 커다란 귀, 긴 꼬리에서 박자를 맞추어 바닥으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마른 수건으로 쥐어짜는 데에 오늘도 훌륭히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데에 성공한 영웅이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맨발로 터벅이며 문을 열었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바닥에 회색빛 흔적이 남았다.
하루 종일 걷고, 뛰고, 넘어지고, 부딪히고, 마지막으로 잊지 않고 진창에 구르기도 한 덕에 (영웅은 전투에 익숙해진 초코보도 여전히 먹을 것 앞에서 한 눈을 팔 수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다시 한 번 더 깨달을 수 있었다) 온몸 곳곳이 욱신거렸으나 이 정도의 통증은 익숙했고...

"이제야 좀 가까이할만하네. 진작에 씻고 들어오지 그랬나... 뭐, 모험가라는 것들이 으레 그렇다 만은."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운 채로 (오른쪽 팔로 머리를 괸 채였다) 툭 잔소리를 뱉었다. 영웅은 이번에야말로 지지 않고 한 마디를 얹으려 했으나... 아씨엔 에메트셀크의 움푹 파인 눈 밑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짙은 색의 그림자와 하얀 조명 아래에서 미묘하게 퍼석해 보이는 피부가 눈에 담겼으므로 입을 여는 대신 건들지 말라는 경고를 남겼던 가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누워있는 탓에 살짝 뒤집어진 검은 가죽 코트 사이로는 불량스럽게 꼬여져 있는 두 발이 보였다)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그 뒤를 쫓았다.



진짜 안 건드렸네? 자신이 두고 간 그대로 놓여 있는 가방을 잡은 영웅이 누가 봐도 신기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로 고개를 갸웃거리다 입맛을 짧게 다셨다. “흠….” 그 소리에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궁시렁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이거든?”
아씨엔 에메트셀크는 가끔가다 꼭 이렇게 이상하게 굴 때가 있었다. 일부러 심술을 부리는 것 같다 가도 당연히 할 것 같았던 일은 하지 않은 채로 그냥 가만히 지켜본다든지, 어린아이를 자연스럽게 배려하는 (만약 이곳에 산크레드가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영웅의 목덜미를 잡았을 것이다. 그런데 맞는 말이긴 하지 않나?) 점이라든지 말이다. 
아무튼 아씨엔 에메트셀크와 산크레드가 들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미간을 찌푸렸을 말들을 뭉텅뭉텅 떠올리며 영웅이 작은 가죽 가방을 거꾸로 들어 열었다. 열린 가방 사이에서 싱그러운 풀 냄새가 말간 손끝과 여전히 물기가 마르지 않아 축축한 손바닥에 천천히 녹아내렸다. 영웅이 잠시 코를 훌쩍거렸다.
도시의 수장을 닮아 다정한 도시엔 여전히 어린아이들이 많았고, 마침 일 메그를 거쳐 지나갈 일이 있었던 영웅이 정신없이 날아다니는 픽시들 사이에서 그 아이들을 떠올린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장난을 치기 위해 달려드는 픽시들을 피하는 도중에 마주쳤던 풀 인간의 머리 위에 길게 자라난 토끼풀이 보였던 것도 또 인연이라면 인연이었을 것이다. 비록 픽시들의 장난을 피하느라 예상한 것보다는 많이 만들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토끼풀.... 인가."

예고 없이 귀를 파고든 음울한 목소리에 영웅이 화들짝 놀라 움찔거렸다. 위아래로 크게 들썩이는 동작에 의해 어깨 위로 둘러져 있던 물먹은 수건이 형편없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어느새 영웅의 바로 옆에 서있던 아씨엔 에메트셀크는 이번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손바닥 위에 고이 올려져 있던 반지들을 자신이 방금 폭탄 마냥 바닥에 던질 뻔했다는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영웅은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자신이 놀랄 걸 알았어도 똑같은 행동을 했을 거라는 데에 망설임 없이 마력이 가득 충전되어 있는 소일 다섯 개를 걸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영웅의 손바닥을 바라보던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무언가 떠올리고 있는 듯한 가라앉은 표정을 마주한 영웅이 잠시 말을 골랐다.

"하나 줄까?"
"..... ...."
악영향이었던 걸까? 아씨엔 에메트셀크의 표정이 더욱더 복잡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바라보던 영웅이 두 눈을 빠르게 끔벅거렸다. 
잘못한 것도 없고 오히려 잘잘못을 따지자면 남의 거주실에 불법으로 침입한 아씨엔 쪽이 더 클 텐데 왜 본인이 눈치를 보게 되는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내 느린 시선을 거둔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무슨 선전포고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에 영웅이 눈을 끔벅 거리던 것을 멈추고 아씨엔 에메트셀크를 바라보았다.

"조악해."
".......?" 영웅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것처럼 고개를 잠시 왼쪽으로 꺾어보였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메말라 버리게 될 반지에 굳이 두 개의 줄기를 둘러둔 이유는 뭐람? 활짝 핀 꽃만 불쌍하게 됐군.... 하등 쓸모도 없는 일을 하시느라 고생 많으셨겠어, 영웅님?"
"아니, 가져갈 것도 아니면서..." 
영웅의 소심한 항변을 말끔히 무시한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가 곧바로 돌아왔다. 그 짧은 움직임에 새하얀 앞머리의 일부분이 드러난 이마를 둥글게 쓸었다가 원래대로 돌아갔다. 
한참 말을 고르던 에메트셀크가 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영웅 나리께서는 토끼풀의 꽃말은 알고 계시나."
"...." 영웅의 두 눈동자가 가볍게 거주관의 천장과 바닥을 훑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뭐.... 기대도 안 했으니 굳이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어."

말보다도 정확한 의사 표현을 바라보던 아씨엔 에메트셀크의 입이 또다시 몇 번 달싹거리다 닫혔다. 그 기묘한 침묵 사이에서 영웅은 이제 조금 흐트러져있는 침대 위에 누워서 쉬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영웅이 발가락을 짧게 움찔거리며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다행히도, 그리 오래지 않아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단단히 끼고 있던 팔짱을 풀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됐어,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냥 잊어버려. 영웅님이 보기 드물게 잘하는 거잖아? 아, 나중에 수정공에게 잘 먹었다고 인사나 대신 전해주고."

예고 없는 손짓과 경쾌한 소리에 놀라 목 끝까지 올라왔던 하품을 다급히 삼켜 딸꾹질을 내뱉은 영웅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이제는 익숙해진 방법으로 아씨엔 에메트셀크가 방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혼자 남게 된 커다란 방 안에서 영웅이 빈손으로 제 볼을 벅벅 긁적였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으나 대답해 줄 수 있을 상대는 이미 방을 떠난 상태였고, 영웅은 꽤 피곤한 상태였으므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허공을 보며 다시 돌아오라 소리치는 대신 손바닥 위에 자리 잡고 있는 세 개의 토끼풀 반지들이 더 상하지 않도록 탁자에 놓인 병안에 있는 물을 살짝 뿌린 후 열려 있는 가방 안에 다시 가볍게 내려놓는 것을 택했다. 반지가 놓여진 부분의 색이 물에 의해 짙게 변했다.
그 후엔 바닥에 여전히 철퍽 떨어져 있던 수건을 뒤늦게 올려 비어있는 의자에 걸어두고, 어두컴컴한 방 안을 아침처럼 환하게 만들어주고 있던 전등을 끄고, 활짝 열려있던 창문을 닫은 후 약간 흐트러진 침대 위에 자리를 잡고 눕는 일들이 순차적으로 이어졌다.
닫힌 창문 사이에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드문드문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으며 길게 하품을 내뱉은 영웅이 무거운 두 눈을 감았다.

어쨌든 머지않아 또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그때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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