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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장미

불가능, 기적

​글 주지스 @JUJISU_0

푸른 장미를 찾는 남자가 찾아왔다. 푸른 장미 같은 독특한 물건이 평범한 시골 꽃집에 그런 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이 기묘하고 이상한 손님에게 가벼운 사과를 드리며 보내려고 했지만, 그는 잠시 둘러 보겠다며 꽃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꽃집 안에는 꽃집답게 꽃들이 만연하다. 봄을 맞아 분홍빛, 노란빛으로 소소하게 섞인 향기가 낯선 손님을 환영한다. 하지만 이 손님은 그 향기가 썩 좋지 않았던지, 아니면 마음에 드는 꽃이 보이지 않았던 건지 처음 봤을 때부터 마냥 미간을 찌푸리고 시선만 적당히 옮겼다.
 
혹시 따로 찾으시는 꽃이 없으시다면 따로 추천해 드릴까요? 이 질문을 하면 어지간한 손님은 괜찮다고 사양하며 나가거나 꽃을 추천받았으나 이 손님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꽃집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딱히 다른 손님이 있어서 방해되는 것도 아니고 하니 결국 손님께서 편히 구경이나 하시라고 하고 다듬고 있던 꽃줄기들을 마저 손보기로 했다.

살짝 고개를 들어 손님이 무슨 꽃을 살피나 했더니 그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쪽이 저쪽을 보고 저쪽을 보고 있으니 당연하게도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마주침을 무마하기 위해 웃으면서 뭔가 도와드릴까요? 라고 물었더니 짧은 침묵 후 한숨(속에 되다만 놈이라고 욕하는 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들었던 건 왜일까)을 내쉰 그는 다음에 또 오겠다며 가게를 나섰다. 그가 나간 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색 자동차가 꽃집 앞을 지나쳐 떠났다. 집이 근처라서 자전거를 몰고 다니는 데다 원체 이런저런 것에 관심이 없어 브랜드도 모르는 그 차는 부드러운 엔진음에 당장이라도 하늘을 날 것 같은 시원한 기동력을 보여주었다.

멋있는 자동차네. 라고 생각하며 가게를 들어가는데 설마 진짜 또 오진 않겠지, 라고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이 무색하게도 다음 날, 며칠, 몇 주. 한 달이 지나 계절이 변하기까지 그는 어느 날 문득 나타날 것 같이 느껴졌지만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를 잊어갈 즈음 계절이 돌고 돌아 다시 봄이 됐을 때 그가 나타났다.

"푸른 장미는 찾아 놨나?"

마치 맡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다시 한번 푸른 장미는? 하고 되물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선 여전히 없다고 조심스레 말하니 그는 똑같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아직 멀었나.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는 1년이 지났음에도 변한게 없어 보였다. 일부가 하얀 앞머리며 살짝 곱슬진 검은 머리. 주름진 눈가며 누가 보아도 비싼 돈 주고 샀을 것 같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아마 태어났을 때부터 이렇게 살았던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돈된 모습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푸른 장미가 안된다면 붉은 장미는 안 될까? 누군가에게 선물할 셈이라 특별한 꽃을 찾는게 아닐까 짐작하고 다른 선물용으로 잘 나가는 꽃들을 추천했지만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돈도 많아 보이는데 지난 1년간 다른 많고 많은 꽃집을 뒤져볼 생각도 하지도 않고 다시 이곳에 온 시점부터 그동안 봐왔던 이상한 손님 안에서 손을 꼽다 못해 일 순위가 될 지경이다. 혹시 다른 꽃집에 연락해서 물어봐 드릴까요? 예전부터 심부름 하나 시키면 쓸데없이 오지랖을 떤다고 들었을 정도로 열심히 하던 버릇이 튀어 나왔다. 아는 꽃집이라곤 얼굴을 트고 알게 된 옆 동네 꽃집뿐이지만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다. 그러자 손님 대기용 의자를 제멋대로 끌어낸 그가 시도나 해보라는 듯 턱을 괴고 고개를 까딱였다.

당연하지만 옆 동네도 시골이다. 그 말은 즉슨 푸른 장미는 없다에 한 없이 가깝게 수렴하다는거지. 차라리 찾아볼게 라는 대답이라도 나오길 기대했다. 하지만 옆 동네 꽃집도 그냥 둘러보면 뭐가 있는지 다 보일 정도로 작으니 없는데 라는 대답이 더 빨리 나왔다. 아, 여기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저 손님에게 이 근처에서 푸른 장미를 구하기는 어렵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옆 동네 꽃집 친구의 목소리로 직접. 스피커폰을 통해 커다랗게 그런 말을 들려주게 될 줄이야.

  "야, 설마 작년에 왔던 퍼런 장미 각설이 왔냐?"

그 순간 누군가 머리를 세게 후려쳐서 기절시켜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전화를 끊었으나 뒤를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평소 친구의 입이 좀 험한 편이긴 했지만 설마 거기서 그런 말을 던질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말이다. 안일하게 남의 입으로 아예 찾아오는 걸 막으려던 생각을 한게 잘못이었다. 얼음장처럼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서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푸른 장미 각설이가 날 말하는 거냐. 분노보단 질문에 가까운 말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돌아보지 못하고 아마도요..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를 끄덕이니 또 대답이 없다. 조심조심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테이블에 기댄 채 턱을 괴고 여전히 무심한 눈을 하고 있다.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원래라면 푸른 장미 따윈 마법과 자연 에테르의 합작으로 이루어져 평범하게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었지. 되다만 네놈들에게 기적이 우리에게는 일상이었다. 어떠한 것을 보더라도 그것이 자연스러운 완벽한 세계. 이런 불완전한 세계에 만족하는 네 녀석은 이해하지 못하겠지, 네 녀석은...

한탄과도 같은 그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든 감정은 꼼짝없이 이상한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두려움이고 두 번째로 든 감정은 이상하리만치 이해 가지 않는 그리움이었다. 남자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읽었는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오도록 하지. 남자는 처음 방문했던 말을 그대로 남기고 그날과 똑같이 멋진 검은 차를 타고 꽃집을 떠났다.

그의 세 번째 방문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1년 후에 찾아왔다. 분명 똑같은 질문을 듣는다.

  "푸른 장미.“

조금 더 짧아졌네.
하지만 두 번이나 당해보면 알게 된다. 이 남자가 찾아오는 시기를. 잠시 기다리라고 손님용 의자를 빼낸 후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야 남자가 찾아올 구실이 사라진다. 다듬어진 푸른 장미 한 아름 안고 나오니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낸다.

  ”내가 찾는 건 하얀 장미를 색소로 물들인 가짜 장미가 아니야. 뭘 믿고 당당하게 들어가나 했더니..”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만든 푸른 장미가 가짜라고 평을 받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만든 꽃다발이라 머쓱하게 서 있으니 그는 꽃다발을 채간다..

  “어차피 푸른 장미를 받을 수 있을 거란 일말의 기대도 하지 않았어. 너희 어중간한 세계에선 푸른 장미의 꽃말은 불가능이라고 하더군.”

그는 푸른 장미 가격을 묻지도 않고 몇 장의 지폐를 꺼내 계산대에 놓았다. 하얀 장미와 색소 값의 몇 배는 되는 금액이었다. 이제야 이 이상한 손님이 떠나는 건가 싶었더니 그는 방금 산 푸른 장미 꽃다발을 다시 안겨 주었다. 다음에 또 오도록 하지. 가짜 장미는 받지 않겠다는 건지, 금액은 금액대로 멋대로 지급한 그는 또 멋대로 꽃집에서 사라졌다. 이 이상한 손님이 오는 날엔 이상하게 일이 한가하고 들뜬 기분이 들었다. 돈은 돈대로 받은 이 꽃다발을 어쩌면 좋을까 보고 있으니 이웃집 친구들이 꽃집 문을 요란스럽게 열며 들어왔다.

  “당신 혼자 있었어?! 생일 축하는 내가 첫 번째지!!”

빨간 리본이 잘 어울리는 백발의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선물 꾸러미를 내밀다가 먼저 품에 안겨진 푸른 장미들을 보고는 내가 일등이 아니잖아!! 하고 좌절하고 말았다. 이 푸른 장미에 대해 어찌 설명하면 좋을까 생각하고 있으니 그녀가 다시 일어나 아쉬워하며 직접 포장한 선물을 내밀었다.

  “누군지 몰라도 당신을 꽤 생각했나 봐. 누구야?“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싶어 고개를 갸웃 이니 그녀가 옅게 웃으며 푸른 장미 한 송이를 집었다.

  ”푸른 장미 꽃말은 기적이잖아. 있을 수 없는 꽃이 있으니 기적이라고. 아마 먼 옛날의 당신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만남을 기뻐하며 찾아왔던 게 아닐까 하고 짐작했어. 아니야?“

종종 몇 년 전에 만난 인연인데 마치 전생에서라도 만난 듯 애틋하게 말하는 친구들의 말을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그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선물이었구나. 주는 방식이 별로지만 나쁘지 않네. 옆에서 그래서 누구냐고 닦달하는 그녀를 두고 만들어진 푸른 장미 향을 맡았다. 내년에도 기적을 축하하러 올 그에게 푸른 장미들을 만들어야겠지. 그리고 언젠간 가짜로 만들어진게 아닌 진짜 처음부터 푸른 장미였던 꽃다발을 안겨주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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