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어떤 환상
양귀비
글 미아 @Mia_in_Amaurot
허영, 환상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니, 완전한 인간인 에메트셀크에게 그 질문은 필요치 않았다. 그래, 그것은 그저 수사학적 표현이었다. 질문조차 아니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온전한 존재는 이 분열된 세계에 단 셋, 아니...... 이제는 둘이 되었지. 나머지 '한 명'인 조정자는 기억이 모호했으므로 이제와서는 유일 그만이 기억하고 있는 풍경과 시간이었다.
1만하고도 2천년. 한 인간이 풍화되기에 충분한 시간. 그의 말마따나 현 인류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란 것이 그들에게 존재하지 않을 리 없었고 그렇기에 그는 때때로 잠이란 이름의 휴식을 필요로 했다. 원초세계와 거울세계를 넘나들며 아씨엔의 진정한 목적을 위해 전념하던 그가, 템페스트의 밑바닥에서 부서진 유적을 마주했을 때의 감상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눈을 깜빡여도 사라지지 않는 옛 그리움의 잔재.
그리하여 그는 그 바다 밑에 환영 도시를 세웠다. 오로지 그의 기억에 기초한, 종말을 맞이하기 전의 아모로트를. 눈을 감으면 고요함 속에 물거품 소리만이 들리는 그 곳에서 그는 이따금 그가 만든 환영들을 내려다보곤 했다. 이 곳에서라면 굳이 과장된 몸짓도, 소리도 낼 필요가 없었고 그는 그저 그의 창조물들을 바라보다 잠에 빠지곤 했다.
에테르의 바다로 채 돌아가지 못한 그의 조각 역시 마찬가지라. 작은 보랏빛 조각에서 피어난 잔상은 그렇기에 '강대한 마도사'로서의 능력을 잃은 채 그저 심해의 환영 속에서 침묵했다. 언젠가 온전하지 못한 존재들을 책하던 그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작은 조각으로 지상에 남았다는 걸 알았을 때 그의 심정이란 그저 한탄 뿐이었으니. 반쪽도 아닌 파편의 환영은 그저 제가 사라질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 그에게 이따금 발걸음하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아닌 그를 끝맺었던 '빛의', 아니 '어둠의 전사' 되시겠다.
"안녕한가요, 에메트셀크."
"......너인가. 질리지도 않나. 이 내게 안녕을 물어봤자 돌아올 말은 뻔할텐데."
"당신이야말로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되었잖아요?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인사에요."
"쓸데없는 짓을."
그리 말하면서도 곁에 다가앉는 여자를 굳이 밀어내지 않는 점이 그의 상냥함이라고 해야할까. 이제사 새삼 잴 거리감도 없다는 듯이 붙어앉은 상대는 남자에게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뭐야."
"언제나의 그것. 오늘의 꽃이에요."
"...하여간. 가져오니 받긴 하겠다만..."
투덜대면서도 내밀어진 꽃을 받아드는 남자를 보면서 미코테 족 여성은 빙긋 웃었다.
"이쁘죠? 당신의 조각과 비슷한 색이에요."
"악취미군. 놀리는 거라면 썩 갖고 사라져라."
"에, 진심으로 예뻐서 가져온 건데. 그런 식으로 말하면 속상해요~."
짐짓 속상한 듯 과장되게 울상을 짓던 영웅이 이번에는 휙 표정을 바꾸어 앉는다. 몇 번이고 밀어내도 되돌아오는 양에 남자가 헛웃음을 지었다. 하. 누가 옆에 앉으라고 했지? 제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치대는 모험가에게 짜증을 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이러다 말겠지, 싶은 맘이 반. 어차피 다시 돌아올테니 힘을 아끼자는 맘이 반이었다. 그런 그를 웃는 낯으로 바라보던 영웅이 다가 앉아 속삭였다.
"그래서, 어때요?"
"뭐가."
"당신이 만든 환상은."
뭐? 남자가 고개를 돌리자 지겹게도 익숙할 모험가의 모습이 순간 일렁이는 기분이 들었다. 쉿.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댄 영웅에게서 일순 빛이 쏟아져나왔다. 그 빛은 그의 시야를 삼켰고, 그리고.
...눈을 뜨자, 그곳에는 햇빛 비치는 아모로트의 거리였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긴 세월을 찾아헤메고도 돌아가지 못했던 장소.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감각이 선연하여, 남자는 도리어 아연해졌다.
"이게, 무슨..."
"...하데스?"
남자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 익숙한 음절의 언어는. 이 목소리는. 문득 제 얼굴을 가리던 손을 치우면 거기에는, 언젠가의 제 가장 친밀한 악우의 모습이 보였다.
"......새로 등록된 건으로 잠시 조언을 구해볼 참이었는데. 아무래도 너와 이 이데아는 상성이 좋지 않나봐. 괜찮아? 보기에는 에테르 멀미라도 하는 것 같았는데. "
천하의 에메트셀크가 에테르멀미라니, 꽤나 진귀한 구경이지만 말이야. 그리 말하곤 쿡쿡 웃는 모습은 그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라서 에메트셀크라 불린 남자는 그저 망연하게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 설마 진짜 상태라도 안 좋은 거야?"
"...휘틀로다이우스?"
"오, 이런. 진짜 영향이 있나보네. 안되겠다. 당분간 이 이데아는 등록 보류로 돌려둬."
가면의 남자가 곁에 서 있던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연속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그의 시선이 그것에 닿고는 멈칫했다.
"잠깐, 그건......"
짙은 자주색의 꽃. 분명 '그녀'가 건넸던 꽃이었다. 그것에 시선을 빼앗긴 그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으면 '친우'라 불린 남자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네 능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야. 그래도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로 해 둘까. 저 이데아... 좋은 꿈을 꾸게 해주는 건 좋지만, 이따금 이런 식으로 문제가 발생하곤 하니까."
왠만해선 등재해주고 싶지만 이런 식으로 문제가 생기면 나로서도 곤란해. 아모로트의 창조물 관리국장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오늘은 그만 가서 쉬어. 친우에게 어깨를 떠밀려 돌아가면서도 에메트셀크의 머릿 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제 방으로 돌아가기 전 지나가는 이들을 붙잡고 탐문한 결과. 남자는 이 곳이 진짜 '아모로트'이며 과거조차 아니고 자신들이 '세계통합에 성공한 결과'로서 주어진 것을 알았다. 주변에서는 자신의 기억에 혼돈이 온 것을 걱정했지만 창조물 관리국의 이데아 실험에 참가한 결과라고 말하면 적당히 수긍해주었다.
그토록 바라던 결과인데. 제 방으로 돌아와 익숙하게 그리운 광경을 보면서도 남자는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 기분이었다. 저 영웅의 일격에 맞고 사라지던 날의 기억이 그에게는 있었다. 환상이라. 어느 쪽이? 가볍게 마른 세수를 하며 창문을 열면 그의 기억에 따르면 여기 존재할 리가 없는 한낮의 아모로트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비원을 이루어내었는데도 가슴이 석연치 않은 것은 그동안의 자신이 마모된 탓일까. 쉬이 믿지 못할 결과이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한참 방 안을 맴돌며 고민하던 남자는 결정을 내렸다.
"휘틀로다이우스."
"어라, 네 쪽에서 먼저 찾아오다니 별일이네. 무슨 일이야?"
"기억에 혼란이 있어. 전의 그 이데아, 아직 처분하진 않았지?"
조금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던 상대가 이내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데아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관해 알아보고 싶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창조물 관리국장은 등재 보류중인 이데아 보관소로 그를 안내했다.
"알겠지.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내려놔. 이건 네 친구로서도 그렇지만 국장으로서의 관리 의무야."
"알았다니까."
작게 심호흡을 한 남자가 손을 뻗자 정보가 담긴 크리스탈에서 익숙한 모양의 꽃이 생성되었다. 자줏빛 꽃이 형체를 가지는 것과 동시에 남자가 조심스럽게 잡아들었다.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했더라. 꽃을 보면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에 생각이 미친 남자가 집어든 꽃을 코에 갖다대고 가볍게 들이쉬었다.
시야가 우그러지고 세계가 암전했다.
어떤 종류의 환상을 마주하기 위해, 남자는 눈을 감았다. 그의 비원이 이루어진 세계에선 떠올리는 것 조차 사치일 그런 환영을. 자아, 이제 어느 쪽이 환상으로 남을 것인가. 깊은 꿈 속으로 침잠할지, 혹은 의식으로의 부상일지.
어질한 감각 속에서 남자는 눈을 떴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