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The Fairest
사과꽃
글 람가 @fafafwafafafa
유혹
“하데스!”
“우와아악!”
분명히 말하건대, 결코 의도한 사고는 아니었다.
거꾸로 뒤집힌 세상. 와르르 무너지는 하데스의 문서 덩어리들을 바라보며, 천장에 거미처럼 대롱대롱 매달린 아젬은 변명이라도 하듯 홀로 그렇게 생각했다. 굳이 이리로 들어온 건, 그야 때마침 천장의 채광창이 열려 있어서였을 뿐이고…. 매번 문을 통해 걸어 들어가야만 할 만큼 예의를 차릴 상대도 아닌데다가, 누구든 점심을 먹고 딱 나른해질 만한 시각이라 조금…재미있는 일을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던 것도 있긴 했지. 그러니까 그 와중에 거기에 놀라 넘어진 하데스가 그만 앉은 자리에서 발을 헛디뎌 쌓인 종이를 죄다 와르르 무너뜨린 건, 어느 한 쪽의 잘못이라기보단 그저 어쩔 수 없는 불운에 불과하지 않느냔 말이다. 게다가 그 불운의 당사자인 하데스에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드디어 할 말을 찾은 아젬이 두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자, 하데스. 생각해봐. 요즘 같은 세상에 케케묵은 노인네들 마냥, 종이 따위에 모든 걸 적어서 다시 그 내용을 검토하는 그 작업 방식을 바꿀 때도 되지 않았을까?
슬쩍 꼬리가 올라간 커다란 입술이 그렇게 말을 건네려던 차에―
“너…….”
―아젬은 생각을 바꾸었다. 저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 미간에 대고 굳이 그렇게 운을 뗄 필요는 없었을 테니까.
쿵.
아젬은 그대로 몸을 돌려 날렵하게 두 발로 바닥에 착지했다. 그래, 변명 같은 건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좋겠다. 그가 아는 하데스라면 저에게서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제대로 된 사죄 같은 건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대신 아젬은 그런 하데스의 곁으로 다가가, 모른 척 그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괜찮겠어?”
아젬의 물음에, 하데스가 미간을 버려진 종이처럼 잔뜩 구겼다.
“왜, 안 괜찮으면 도와주기라도 하려고?”
아젬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또 그런 매몰찬 반응이라니….”
“날 웃길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또 뭐야? 내 일을 방해나 할 셈이라면 저리 좀 꺼져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젬. 보다시피―”
“에메트셀크는 지금 바빠서. 알지, 알아. 하지만, 어쩌겠어. 나는 이렇게 이미 찾아와 버렸고―”
불쑥,
연극배우처럼 상대를 과장되게 흉내 내던 아젬이, 급작스럽게 그런 하데스 쪽으로 제 허리를 잔뜩 수그렸다.
숨결이 닿고, 시선이 다가온다.
아주 잠시간의 정적. 그리고…….
“…….”
하데스는 투명인간이라도 앞에 둔 것 마냥 아젬을 외면한 채, 쓰다 만 제 손 아래의 종이를 향해 고개를 툭 떨어뜨려버렸다. 다만,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매정해. 이틀 만에 만났는데, 반응이 그게 다인가?”
“난 정상이야. …너야말로 뭐에 그렇게 들뜬 거야, 답지 않게……흠.”
입이 다물린다. 잉크가 묻은, 바지런히 움직이던 손이 멈추고―이윽고 이치를 꿰뚫는 하데스의 황금빛 날카로운 시선이 잔뜩 어질러진 자신의 책상 위를 한 바퀴 휘 훑었다. 한숨을 한 번 내쉰 하데스는 이내 오른손을 가볍게 들어 올리고서 엄지와 중지를 딱 소리가 나도록 한 번 튕겨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널브러져 있던 문서가 자아라도 가진 것처럼 원래의 자리로, 원래의 순서대로 정렬되기 시작한다.
역시나….
아젬은 내심 탄복하며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지성도, 본능조차도 갖지 못한 무생물이 순서를 스스로 찾아간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술사가 여백과 획, 스스로 써내려간 맥락에 각기 다른 종류의 계산을 밀어 넣어 그들 사이에 작은 계界를 만들어 냈다는 뜻이었다. 치열하게 사고하고, 다시 그것을 술식으로 검증한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금 타인의 판단이라는 가장 선뜩한 도마 위에 올려놓는다…. 훨씬 덜 번거로운 방법을 제치고서 하데스가 굳이 이런 번거로운 방식의 수기手記를 택하는 이유는 단 하나―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을, 이치와 자신이 적을 둔 이 네모반듯하고 창연하기 짝이 없는 아름다운 도시와 그 주위를 구성하는 수많은 이치를…그 누구보다도 말이다.
“이번엔 또 뭐야.”
그런 그이니, 금방 눈치 챘을 것이다. 아젬이 제 몸에 무엇을 지니고 왔는가를. 그러니…
“자.”
구태여 더 그를 애태울 필요는…이제 더는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젬은 곧바로 제 품에 숨겨 두었던 것을 꺼내 들었다. 달큰한 냄새를 풍기는 나뭇가지 하나가 주변의 빛을 현란하게 반사한다. 전혀 뜻밖의 물건, 뜻밖의 외관…. 하데스는 그것을 향해 두어 번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니까, 아젬이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가져온 그 물건은―
“금빛…사과꽃?”
“정답.”
아젬이 햇살처럼 웃으며 하데스의 눈앞에서 그것을 살며시 흔들어 보였다.
금빛 사과꽃 가지.
이제 갓 태어난 여린 뼈마냥 가느다란 가지에, 작은 구름 같은 꽃 여러 송이가 뭉게뭉게 피어난다. 가지와 꽃과 이파리의 표면에는 부스러기 같은 사금이 흩뿌려져 있었는데, 자세히 살피면 이 나뭇가지 자체가 태생부터 황금을 그 외피에 두른 채로 자라나는 종種이란 것을 누구든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햇빛을 찬란하게 반사하며 빛나는 그 꽃가지는 여러 갈래로 뻗은 채, 아직 열리지도 않은 열매의 향기를 달콤하고도 풍부하게 사방으로 뿜어내고 있었다.
“네 거야.”
아젬은 그 황금색으로 빛나는 꽃송이 중 하나를 하데스의 머리 위에 장식처럼 꽂아 넣었다. 그러면서 속삭였다.
“방금 기념으로 하나 얻어왔어. 새로 등록된 녀석이라는데―아, 물론 생물로 등록될 건 아니니까 안심해. 굳이 범주를 나누자면 이건…기념품 쪽이더군.”
“기념품이라고?”
“알고 있지 않아? 군락을 만들어 번식시키기엔….”
그리고 채 이어지지 않은 설명을 마저 끝맺은 것은, 바깥바람에 거칠게 삭은 아젬의 손끝이었다. 아젬의 단단한 두 손가락 안에서 얇은 사금이 모래처럼 부스러져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금은 아름답지만, 에테르를 지나치게 소모하기에 무턱대고 만들어낼 수 있는 원소는 아니었다. 게다가 수많은 생명들에게 그것은 그저 독에 불과한 물질이니, 구태여 사과나무라는 촉매를 통해 그 중금속이 이 땅의 일부를 뒤덮게끔 할 필요는 없지 않았겠는가.
한데도 아젬이 그것을 하데스에게 가져온 이유는 단 하나.
가장 아름다운 이에게.
…이 나무에 붙여진 고유의 이름이, 자꾸만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에….
“…….”
아젬의 손가락이 하데스의 뺨 언저리를 향했다. 그렇게, 고집스럽게 다물린 지식인의 입술이 막 열리려던 바로 그 무렵이었다.
“…에메트셀크!”
“이런, 망할…!”
누군가가 이 집의 문을 벌컥 열며 하데스의 직함을 불렀다. 아마도 그 현장을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제 자신의 눈가를 매만지던 아젬을, 하데스는 작은 욕설과 함께 다급히 저만치로 밀쳐내 버렸다. 제법 무시무시한 힘으로 튕겨나간 아젬이, 하데스가 아무렇게나 정리해둔 책과 잼과 크고 작은 시료 통들 위로 아무렇게나 뒹굴었다.
콜록, 콜록.
하데스의 시선이 넘어진 아젬의 몸 위를 불안스레 훑었다.
“…무슨 일이야, 또?”
그러나 곧, 하데스는 ‘에메트셀크’를 필요로 하는 이를 따라 사라졌고―
짐짓 다친 짐승처럼 홀로 몸을 뒤틀며 켁켁거리던 아젬은, 그때서야 그대로 그 자리에 미끄러지듯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비에 푹 젖은 개처럼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던 시선을 스스로 거두고서 말이다.
그래. 그 대단한 에메트셀크가 온 힘을 다해서 밀쳐냈으니…어쩌겠어. 따라가지도 못하고서 이곳에 무력하게 벌렁 나자빠질 수밖에.
물론, 알지. 그 오갈 곳을 모르던 홍채의 움직임과, 그 어떤 열매보다도 붉게 물들어 있던 낯빛을 보면 말이다. 너는 그 누구보다도 나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언제나 세계를 위하느라 스스로 목을 축일 기회를 포기하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알려주게 될 지도 모른다.
수확의 결과물은, 너 자신의 입을 축일 수 있을 때 가장 달게 느껴지리라는 것을….
얼마 후, 아젬은 곧 가면을 고쳐 쓰고서 홀로 하데스의 거처를 빠져나왔다. 집무 책상 위에 제가 가져왔던 사과꽃 가지를 그저 가만히 올려두고서.
“뭐야?”
“뭐긴?”
와삭.
아씨엔 에메트셀크는, 영웅이라 불리는 이가 새빨간 열매를 천연덕스레 덥석 무는 양을 멀뚱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질문을 받은 이는 커다란 두 눈을 끔벅거리더니, 이내 망설임 없이 활짝 웃으며 그렇게 대답한다―“보면 몰라? 사과잖아!”
한심한 녀석. 에메트셀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제 3의 눈이 자리한 미간 위를 손바닥으로 한 번 길게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이걸 왜 날 주냐고….”
그러니까, 이 사과가 무엇인지는 에메트셀크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막 크리스타리움에서 생육에 성공했다는, 단맛보다도 풍성한 향과 과즙이 일품인 신품종이었다. 살짝살짝 붉은색이 섞이긴 했으나 전반적으로 황금빛이 도는 그 사과에게, 이것을 개발한 식물학자들은 옛 푀부트의 영락을 되새기며 ‘폴디아의 기쁨’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고 했다.
“…….”
에메트셀크는 그 사과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미간을 살포시 찡그렸다. 자신이 궁금한 바는 이 사과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대체 ‘왜’ 이것을 그가 자신에게 가져왔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의도일까. 설마 독이라도 넣은 건 아닐 테고, 신품종까지 개발하며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피력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옛 공주의 이름을 딴 이 작은 열매를 통해 아씨엔들이 저지른 짓에 대한 죄책감이라도 느끼게 해보려는 수작일까? 한데 영웅으로부터 뒤이어 돌아온 대답은,
“그냥.”
그 긴 세월을 살아온 그로서도 전혀……뜻밖의 것이었다.
“그냥?”
영웅이 남은 과육을 크게 한 입 깨물면서 말을 이었다.
“자고 일어나니…사과를 주고 싶었어. 그래서 제일 맛있는 걸 달라고 해서 얼른 가지고 온 거지. 그게 다야.”
“허.”
영웅이 양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로…인가? 맛이 없어? 모양이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라….
에메트셀크는 자신이 받아든 사과를 멍하니 내려다보다, 저도 모르게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래. 정말로 너란 사람은―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르겠군….”
그리고서는 사과의 달콤한 향에 푹 빠진 영웅이 그 말을 듣지 않았기를 바라며, 황금빛 껍질의 표면에 제 입술을 떨어뜨리고선 홀로 그렇게 사고했다.
아니, 닮지 않았어. 하나도 안 닮았어.
새로 등록된 녀석이라는데―아, 물론 생물로 등록될 건 아니니까 안심해. 굳이 범주를 나누자면―
닮지 않았어.
그러니 이 아찔하도록 단 향내가 어떤 추억을 떠오르게끔 한 건, 그저 사소한 우연에 의해 벌어진 일에 불과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때 책상 위에 그가 올려두고 간 꽃송이는 결국 시들고 말았다. 무의미한 금쪼가리만 남긴 채, 스스로 살아 꿈틀거리는 종이 위의 글자를 그 시체 아래에 무자비하게 짓누르고서. 그래. 그러므로,
“어때?”
“괜찮군. 황제의 진상품 후보 정도는 되겠어.”
그러므로 생각한다.
입 안으로 밀려드는, 사치스럽도록 풍성한 이 향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없어야만 한다.
영웅의 말에 여상스레 답을 건넨 뒤, 에메트셀크는 잇자국이 남은 금빛 과육 위로 한 번 더 제 이를 박아 넣었다. ■

bottom of page